Egloos | Log-in  


PM 11:50

나는 왜 1월만 되면 아프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가. 감기가 떨어진지 일주일만에 또다시 감기라니 건강체라고 믿었던 내게 믿기지 않는 사건이다. 물론 이번 설에는 여러가지의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긴했다. 드라마나 영화의 뻔한 클리셰 중의 하나인 '죽음과 탄생은 결국 같은 이치'라는 것을 몸소 느꼈던 며칠이랄까. 비교적 먼 일인 부음에는 가지 않았고, 갑작스러웠지만 가까운 탄생에는 기꺼이 달려갔다. 이틀간의 산고 끝에 제왕절개로 태어난 나의 첫 시조카 음율군. 조금 엉뚱한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것'인 조카의 모습에 온몸이 찌릿찌릿해졌다. 누군가가 태어날 때마다 임신과 출산은 대단하고 신비로운 일이라고 느낀다. 나와야할 때를 알고 기특하게 문을 두드린 아기도 대단하고, 아기가 잘 나올 수 있도록 모든 힘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엄마도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9개월여간의 정성과 수고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다.

먼 훗날이라고 가정하고 있지만 여하튼 '가깝지않은 미래에 엄마가 되었을 때' 엄마로서의 삶 역시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사람이 되고싶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한 점의 후회도 없이. 너무 강한 어조인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가지못한 길에 대해 한탄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처럼만에 2인용 책상에 1인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뚝심있게 들어앉았지만 감기 탓인지 미열 탓인지 춥고 어지러웠다. 게다가 우연히 바라본 방의 천장 모서리는 윗집 보일러에서 새는 물이 뚝뚝 떨어져 벽지를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당장에 집주인을 부르고, 집주인은 수리공들을 불러들였다.'이봐요. 화장실을 정상적으로 쓰게된지 이틀만에 방에서 물이 떨어지다니요!' 사실 이렇게 따지고 말할 힘도 없어서 마음속으로만 속삭였다. M이 적당한 예의를 갖추면서 그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동안 나는 따뜻한 보리차를 주전자 가득 끓여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그래서 일을 했느냐하면 그것은 아니고 1인용 작업 스탠드를 열심히 골랐다. 비싸고 근사하고 멋진 것 말고 오로지 작업을 위한 이케아 스탠드와 도큐멘터리 파일함 그리고 물건을 대충 쑤셔박아도 좋을 라탄바구니 하나를 담아 결제까지 신속하게 마쳤다. 천장이 새는 것은 결국은 고쳐질 일이고, 싱크대의 합판이 맞지 않는 것도 고쳐질 일이다. 다만 수리에 시간이 걸리거나 번복되면서 이 집에 사는 우리에게 마이너스 에너지를 주는 것인데 그런 사소한 사건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M은 대단한 자의식이라고 껄껄댔지만 내게는 중요하고도 심각한 일이다. 멋 없는 스탠드가 도착하면 멋부리지 말고 물 떨어지는 천장은 떨어지라고 내버려두고 코뿔소처럼 진득히 책상에 앉아 나는 나만의 길을 가야지.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오로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감기와 함께 1월이 지나가고 있다. 


.

by h | 2012/01/27 00:29 | 되도록 짧게 | 트랙백 | 덧글(14)

한남동 5mile

1월의 어느 토요일 오전에 가구보러 이태원에 들렸다가 즉흥적으로 향했던 한남동 5mile.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과 일부러 찾아가야하는 귀찮음 중에 대개는 후자쪽이 이기는 편인데 이 날만큼은 달랐다. 나와 한번은 꼭 가보고 싶었다던 JJ의 결연한 의지와 기동력 넘치는 BJ의 자동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회자되는 카페답게 탁 트인 실내와 무심한듯 영리하게 잘 나눈 공간들이 인상적이었다. 눈에 띄게 편안한 의자도 없었지만 지나치게 불편한 자리도 없어서 어느쪽에 앉아도 그럭저럭 만족도가 높은 카페랄까. 카페라기 보다는 레스토랑에 가까운 쪽이었지만 천장이 높으니 아무래도 좋다. 도미를 얹은 봉골레, 마르게리따 피자,오믈렛 라이스 그리고 로얄 까르보나라를 시켰는데 딱히 나쁘지도 그렇다고 인상에 확 남을만한 맛도 아니었다. 이것을 좋다고 해얄지 나쁘다고 해얄지. 캐쥬얼한 카페에서 이 정도의 가격과 퀄리티라면 되려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하긴, 인테리어가 근사한 카페치고 음식조차도(디저트를 뺀) 빼어난 경우를 본 적이 별로 없다. aA에서 가끔 끼니를 해결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수 없는 경우에 한해서이며 그것도 빠니니라는 한가지 메뉴에 국한된다. 언제는 맛으로 먹었나. 멋으로 먹었지.

함께 서브되는 도톰한 두께의 굿럭 식빵은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한봉지 사와서 이틀내내 뜯어먹고 있다보니 분위기는 괜찮으나 맛은 쏘쏘였다는 내 기억과는 상관없이 또 가고싶은 생각까지 들더라. 한남동 오거리라는 지명만 기억해둔다면 다음번에는 찾기가 수월하겠지만 게으름뱅이이며 뚜벅이인 나에게 한남동이란 심적으로 머나먼 동네의 이야기. 어쨌거나 변화를 위해서라도 가끔은 즉흥적일 필요가 있겠다.

by h | 2012/01/25 17:49 | 테크니컬피크닉걸 | 트랙백 | 덧글(14)

AM 03:20

새벽에 갑자기 떠오른 말. 몇번 마주친 적이 있었던 지인의 지인이 날더러 "친절해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안친절한"이라고 했었나 아님 "성격이 좋아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낯을 가리는"이라고 했었나 여하튼 비슷한 요지의 말을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어렵지않은"이나 "까칠해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정한"쪽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왔었는데 남들이 보는 모습은 정 반대인가보다. 남편도 나에게 말했었다. "엄청나게 불효할것 같은 성격이지만 의외로 효녀"라거나 "무능하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생활력을 자랑하는". 또 뭐가 있더라. "예민하게 굴 것처럼 생겨서 실제로는 단순무식한"과 "깨끗하고 정리정돈을 잘할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러운"이라거나. 내가 되고싶은 것과 실제로의 모습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by h | 2012/01/20 03:38 | 되도록 짧게 | 트랙백 | 덧글(16)

생각하는대로

자려고 누웠다가 다시 일어난 것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선 일단 카디건이라도 하나 걸쳐야한다. 신발을 신고 나가서 아직은 비어있는 옆집 화장실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벌써 3일째. 아랫집 벽은 우리집 화장실에서 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물로 인해 벌써 반이나 젖어버렸단다. 타일을 모두 뜯어 방수공사부터 다시하려면 화장실 복구까지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한달치 집세를 감면해주는 조건으로 마지못해 승낙하긴 했지만 아침마다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무더기로 들이닥치는 것도 내키지가 않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우리집 현관을 나와 옆집으로 가야하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물론, 샤워를 할 때도 샤워용품을 이고지고 옆집으로 가야한다. 이것은 처음이 아니다. 이사오고 나서 거의 2주일간은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엄청난 공사소음을 들어야했고-심지어 이사까지 마친 윗집 신혼부부는 소음소리에 놀라서 이틀만에 짐을 싸서 나가기도 했다-그 후에도 공사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이를테면 쿡탑의 팬을 켰는데 윙윙 소리만 요란할 뿐 연기를 빼주는 연결호스는 정작 연결도 안되어 있다거나, 보일러 점검을 마치지 못해서 며칠동안이나 인부들이 왔다갔다 한다거나, 결정적인 것은 앞베란다처럼 되어있는 거실 창문의 유리창이 완전히 잠기지 않아서 작게나마 공사를 해야했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누가 털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올라와서 문을 열 수 있었다는 소리다. 넌덜머리가 나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소 성격답지않게 불같이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공무원인 집주인 부부가 너무나 미안해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오며가며 안면을 튼 공사감독 아저씨들이 능력은 없을지언정 나쁜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는 것은 곧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다들 가정이 있을 사오십대의 아저씨들이 우왕좌왕 하는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짠한 마음이 들었달까. 물론 새벽시간에 오로지 옆집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나야하는 이런 상황이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이도 한참 어린 나에게 아침마다 사모님 소리를 붙여가며 죄송하다고 말하는 현장감독 아저씨한테는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다. 언젠가 계단에서 마주쳤을때 딸과 다정히 전화통화를 하던 것을 본 이후론 더더욱 그렇다. 이미 공사를 오케이 한 마당에 일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그렇고, 해서 요즘의 나는 아침마다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과 굿모닝 인사를 하고 원래 잠이 많은 인간이라고 양해를 구한 후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잠이 든다. 부정적이 되려면 한없이 부정적이 될 수 있고, 긍적적이 되려면 한없이 긍정적이 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며칠안에 공사는 끝날테고 다시 평온이 찾아오게 되면 화장실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겠지. 더이상 집에 마음쓰는 일이 없기만을 바라는 것이 지금 바라는 최선의 상황이 아닐까 싶다.

by h | 2012/01/19 03:11 | 생활의 무늬 | 트랙백 | 덧글(20)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