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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기간


 딱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채 한달반이 흘러버렸다. 한달반동안 밤낮없이 집중을 했다면 이미 끝났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또다시 얻게된 유예기간이 되려 감사하다. 실은 어딘지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했노라고 고백한다. 한번 되새김질 해볼 겨를도 없이 무턱대고 달리다가 넘어져버리기도 하면 다음번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차근차근 해보고도 싶었다. 이것이 떡인지 쌀인지 돌인지는 알고 삼켜야 소화가 안되어도 할 말은 있을것 같아서.

 가장 화가 났던 이유는 역시나 내 자신에게 있었다. 최근들어 스스로에게 화가 잔뜩 난 상태가 계속되었다. 책상에 앉기까지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건지, 힘들게 앉은 책상에서 도대체가 집중력이 없는건지, 부엌은 거의 포기한채로 비싼 돈을 지불한채 왜 그렇게 몸에 해로운 것만 먹고 다니는건지, 신나게 놀지도 못하고 무섭게 노력하지도 못하면서 지리하게 흐른 시간들이 온통 후회스러웠다. 누군가는 내게 완벽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이라고 말해줬지만 내가 아는 진실된 나는 완벽의 ㅇ에도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다. 난 그저 부끄럽고 싶지 않아서 괴로워하는지도 모른다.

 한달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왼쪽어깨의 근육이 돌처럼 단단히 굳었고,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입술의 아토피 증상이 일년여만에 재발했다. 책상위에서 보내는 시간동안 얻은 것들은 대략 그러하다. 40여일의 유예기간이 새로이 생긴 지금 무엇보다 나는 내 스스로부터 즐거워질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다. 처음엔 이것도 오로지 '재미있을것 같아서' 오케이를 외치지 않았던가. 컴퓨터를 꺼야겠다. 책상을 박차고 나가야겠다. 반년넘게 미뤄운 운희씨의 작업실에 찾아갈 것이고, 말벡씨가 보고 싶어하는 어벤져스도 함께 볼 것이고, 텅 빈 냉장고를 채워서 투움바 파스타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골드컬러의 플랫도 한켤레 사서 마음편히 서점에도 가야지. 충분히 자고, 충분히 먹고, 충분히 산책한 다음 '재미있을것 같아서 오케이를 외쳤던 여자의 심정으로' 책상에 앉을 예정이다.
   

by h | 2012/05/18 02:39 | 생활의 무늬 | 트랙백 | 덧글(10)

꽃 그리고 5월

 굳이 꽃을 들여놓지 않아도 온 천지가 알록달록한 요즘. '은교'보고 나오는 길에 홍대입구역에서 8천원 주고 산 꽃 두단을 창가에 꽂아놓았다. 오래 보려고 삼다수까지 콸콸 부어주었는데 눈에 다 담지도 못하고 며칠만에 시들시들하고 있다. 아까워서 일어나자마자 몇컷을 찍고, 찍고나서 확인해보니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하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꽃은 다 좋다. 소싯적에 꽃가게 하면 잘하겠다는 소리도 여러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안다. 나는 못해. 아마 그 어떤 가게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작할 때는 특유의 추진력으로 엄청나게 밀어붙이겠지만 두어달이 지나면 규칙적인 것은 역시 힘들다고 나가자빠질 것이 뻔하다. 몇달째 붙잡고 있는 프로젝트 하나도 결국은 지구력이 필요한 일인데 오늘 저녁만 해도 집중이 안되서 머리를 몇번이나 쥐어박았는지 모르겠다. 앉아있는 4시간 중에 1시간이라도 집중하고 있으면 나름 성공이랄까. 다 큰 어른이면서 이렇게 바보같이 굴다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래서 뜸했다. 친애하는 봄이니까 더 많이 기록하고 싶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일단 출근을 하고 나면 밤늦게까지는 거의 정신이 없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다른 컬러의 원피스도 입어보고, 굽 높은 샌들도 신고, 벤티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꼭꼭 챙겨서 마시는 요즘이지만 뭔가 좀 해보려고 하면 밤 11시. 이렇게 정신없이 흐르는 날들이 좋은 건가,라는 생각도 해보고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지금 아니면 아닐 시간이라 소중한 것 같기도 하고 이래저래 기억에 남을 5월이 될 것 같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좀 더 치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괴리감이 크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그리고 최근들어 또 하나 느낌 것은 슬프게도 내겐 글 쓰는 재주보다 말하는 재주가 좀 더 나은것 같다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참 그렇다.

by h | 2012/05/10 02:02 | 테크니컬피크닉걸 | 트랙백 | 덧글(44)

5월에 필요한 것

5월에 필요한 것은 잠이 깰랑말랑 할 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결단력이다. 늘어자게 자고 일어나면 죄책감이 드는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 김밥을 쌌고, 딸기를 씻었고, 샐러드를 만들었다. 재활용 쓰레기까지 말끔하게 비우곤 츄리닝차림으로 뒷산에도 올라갔다 왔는데 아직도 점심시간 전이니 침대를 박차고 일어날만하다.

by h | 2012/05/02 12:38 | 테크니컬피크닉걸 | 트랙백 | 덧글(12)

PM 10:59

A4 용지 두장이나 석장도 채우지 못하고 다섯시간째 사무실에 앉아있다. 타인에게는 그토록 가혹하게 굴면서 스스로에게는 이렇게 관대하고 나태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나날들이다. 스스로의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행동을 했을 때 나는 절망한다.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타인에게는 절망하지 않지만 오로지 나. 나 때문에 절망한다. 다섯시간동안 커피를 네번 끓이고 토마토를 여섯개나 집어먹었다. 왜 신고 나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9cm 힐은 저 멀리로 던져버린채 내가 싫어서 그냥 비스듬히 앉아있다. 시작할 때의 열정만큼 모든 것이 유지된다면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었을지 모르겠다. 내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두나 가방같은 것이 아니라 인내와 끈기가 되어야 맞다. 돈을 주고서라도 인내와 끈기를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살 수가 없다면 딱 한달만이라도 빌리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심정. 
  

by h | 2012/05/01 23:11 | 되도록 짧게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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